아라곤
대부분의 반지 영화 관객들처럼 나도 꽤 오랫동안 영화의 아라곤이 원작의 아라곤보다 더 호감가고 잘 묘사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아...난 왕 같은 거 되길 바라지 않는데'하고 적당히 고뇌해주는 영화의 아라곤이 시종일관 '난 왕이 될 사람이란 말이오!!'하는 대사를 입에 달고 다니는 원작의 잘난척하는 인간보다 더 정이 갔던 것. 내가 원작의 아라곤이 결코 '혈통 하나 믿고 잘난척 하는 놈'이 아니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된 건 어느 날 날잡아서 원작 뒤의 부록을 정독한 후였다.

원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엘렌딜의 아들들이 세운 나라가 북왕국 아르노르와 남왕국 곤도르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엄밀히 나가자면 북왕국 영토는 또 셋으로 갈렸지만 그것까지 따지자면 골치아프니 넘어가자). 맏아들 이실두르는 북왕국의 왕이었고 남왕국의 왕은 둘째 아들 아나리온이었다. 남왕국 곤도르는 중간에 왕통이 끊겨도 반지 전쟁때까지 명목을 유지하지만 북왕국은 이미 반지 전쟁보다 천여년 전에 몰락하고 북왕국의 후손들은 더이상 국가가 아닌 두네다인이라는 부족의 일원으로 떠돌게 된다. 북왕국 왕가의 후손들은 대대로 두네다인의 족장직을 맡았으며 아라곤은 그 마지막 후예다.

특기할 것은 남왕국 곤도르에서 3시대 1944년에 벌어졌던 사건이다. 당시 곤도르의 왕 온도헤르는 두 아들과 함께 전투에서 전사하고 남왕국에는 왕통을 이을 직계 남자 후손이 사라진 상태가 된다. 그러자 북왕국의 왕 아르베두이는 자신이 엘렌딜의 피를 이은 후손일 뿐 아니라 온도헤르의 딸과 혼인했다는 점을 들어 남왕국의 왕관을 요구한다. 비록 곤도르에는 여자가 왕위를 이을 수 없었지만 곤도르와 아르노르의 공통 조상이 살던 누메노르 땅에서만 해도 성별과 관계없이 왕의 첫아이가 왕위를 물려받았던 전통이 있었으므로 왕과 왕자가 모두 죽어버린 지금 공주에게 왕통의 계승권이 가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온도헤르 왕의 steward였던 펠렌두르가(데네소르의 조상이다) 주도한 곤도르 귀족 회의에서는 북왕국 왕의 요구를 거부하고 남왕국 왕가의 방계후손인 에아르닐을 왕으로 추대한다. 이 때 북왕국 왕이었던 아르베두이의 먼 후손이 아라곤이므로 아라곤과 섭정가 사이에는 벌써 먼 옛날부터 악연이라면 악연일 게 존재했던 셈이다.

이 일화가 말해주는 것은 아라곤이 곤도르의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서는 단지 이실두르의 후손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는 것이다. 엘렌딜의 자손이라는 것은 필요 조건일지언정 충분 조건은 아니다. 그가 엘론드의 보호 아래 엘프들 사이에서 자랐다는 것도 딱히 그의 특별함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북왕국이 몰락한 이래 두네다인 족장들은 모두 엘론드의 후견을 받는 것이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아라곤은 단지 왕이 될 가능성이 있던 수많은 후보자 중 하나였을 뿐이다. 설사 엘론드가 성년이 된 아라곤에게 너는 너의 조상 중 누구보다도 높이 솟든가 누구보다도 뼈저린 패배를 겪게 되리라 예언했다 해도 이는 아라곤이라는 인물의 특별한 자질보다는 아라곤이 태어난 시대의 특별함에 근거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의 아라곤은 언제나 자신을 증명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믿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이 왕될 자격 있는 인물임을 보여야한다. 누가 등떠밀지 않아도 그는 알아서 사자의 길로 들어서고 간달프에게 팔란티르를 요구하고 저녁별이 수놓은 왕의 깃발을 펼쳐보이며 치유의 손으로 섭정가의 후손을 살려낸다. 파라미르가 자신을 깨워낸 아라곤에게 "당신이 부르셨기에 왔습니다, 주군이여. 왕께서는 제게 무엇을 명하시렵니까"라고 말할 때 그것은 파라미르 개인의 충성의 표시일 뿐 아니라 드디어 곤도르의 섭정이 북왕국의 후손을 왕으로 인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파라미르가 머리 숙였다고 상황 종료인 것도 아니다. 파라미르가 아라곤을 인정한 후에도 아라곤은 미나스 티리스에 입성하지 않고 계속 성 밖에 머무른다. 그가 정식으로 왕으로서 성에 들어서는 것은 임시 섭정 파라미르가 백성들에게 이 분을 왕으로 모실 것인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 후다. 줄여 말하자면 원작의 아라곤에게는 갈 길이 멀고도 멀었다. 그가 끊임없이 자신의 왕이 될 자라고 되뇌이는 것도 반쯤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말이었을 것이다. 고난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반면 영화에서는 남왕국과 북왕국 사이의 복잡한 역사는 사라지고 아라곤은 유일무이한 이실두르의 후손으로 등장한다. 감히 혈통 갖고 그에게 딴지를 걸 자는 없다.(따라서 북쪽 떠돌이 후손 따위에게 머리 못숙인다고 꽥꽥대는 데네소르만 싸가지 없는 미친놈된다. -.- 원작 설정으로 보자면 데네소르가 아라곤을 인정 안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오히려 아라곤이 극복해야 할 것은 주위의 무시가 아닌 스스로의 주저와 망설임이다. 그는 계속 나는 왕같은 거 되고 싶지 않다고 툴툴거리다 미래의 장인이 직접 와서 안두릴 쥐어주고 사자의 길로 등 떠밀고 나서야 비척비척 움직이는데 이것은 원작의 아라곤 입장에서 보면 배부름의 극치다. 금쪽같은 딸네미가 저 놈 아니면 안된다고 배째기에 뒤를 밀어주게 되긴 했지만 누가 옆에서 계속 찔러줘야 움직일 생각을 하는 사위놈을 보는 엘론드의 심정은 얼마나 복장이 터졌을까. 원작에서도 엘론드는 아르웬과 아라곤의 결합에 반대하는 입장이긴 했지만 최소한 원작의 아라곤은 "기필코 왕이 되어 댁네 따님과 혼인하고 말겠소!"하고 알아서 불타오르는 성실한 사윗감이기라도 했지 영화 버전 아라곤처럼 "아르웬 너무 부담스러워요. 전 걔가 그냥 서역으로 가버렸으면 좋겠어요"하는 의욕상실은 아니었다.

아라곤의 신분 변화와 맞물려 변한 것은 보로미르의 역할이다. 원작에서의 보로미르는 딱히 아라곤에게 고개 숙일 이유가 없다. 아라곤이 아무리 이실두르의 후손이라 한들 이미 천 년도 더 전에 보로미르의 조상이 떡하니 이실두르의 후손의 왕위계승권을 부정한 예가 있지 않은가. 보로미르에게 있어 아라곤은 단지 어쩌다 동행하게 된 집단의 리더일 뿐(단독 배낭여행 중 어쩌다 같이 다니게 된 패키지 관광단의 가이드쯤 된달까) 결코 그가 지속적으로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이 아니다.

반면 영화에서 레골라스는 아라곤을 무시하는 보로미르에게 말한다. "그는 이실두르의 후손이오, 당신이 충성을 바쳐야 할 분이란 말이오!" 이실두르의 후손, 그걸로 충분하다. 꿇어라, 보로미르.

그리고 아라곤의 신민 보로미르의 임무는 "아이 참 내가 꼭 그 왕이란 걸 해야하나"하고 빼는 왕에게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곤도르는 폐하를 필요로 하나이다!!"하고 매달리는 것이다. 아, 물론 처음에는 천년간 곤도르 국가원수직을 맡았던 섭정가의 장손답게 "곤도르엔 왕같은 거 필요없어!"하고 아라곤에게 틱틱대긴 한다. 하지만 원정이 진행되면서 보로미르는 잽싸게 자신의 위치를 학습하고 벌써 로스로리엔에서 아라곤에게 함께 곤도르로 가자고 졸라대더니 급기야 아라곤을 자신의 왕이라 부르며 숨을 거둔다. 그리고 보로미르는 임무를 해냈다! "내 혈통에 무슨 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미나스 티리스와 우리 백성을 지킬게"하고 곤도르에게 약속함으로써 아라곤은 드디어 곤도르에 붙들리는 몸이 된 것이다. 보로미르에게 약속하면서 아라곤은 왕이 되는 것이, 혹은 사정상 왕은 못되더라도 어쨌든 곤도르를 위해 한 몸 바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고 의무임을 받아들인다. 영화에서 보로미르의 죽음은 아라곤의 왕으로서의 자각과 탄생의 순간이기도 하다.(원작에서 보로미르의 죽음은 아라곤에게 있어 단지 '재수 옴붙은 날'일 뿐이었다)

보로미르의 임무가 커진 대신 영화에서 파라미르의 역할은 줄어든다. 원작에서 처음으로 그는 아라곤의 왕권을 인정하는 섭정가의 인물이었지만 이미 그 역할은 원정대 때 형이 잡아먹었다. 그의 인정 따위, 아라곤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굳이 그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아라곤은 그에게 와서 왕이 되었다. 치유의 집에서 아라곤이 약손을 발휘할 기회가 영화에서 무참히 잘려나간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원작의 아라곤은 여전히 내게 있어 딱히 친해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뻣뻣하고 외골수인데다 '나는 남과 달라!'라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그런 인물이 되어야 했던 이유는 이해한다. 물려받은 거라고는 부러진 검쪼가리밖에 없는 인간이(전당포에 잡히지도 못할 바라히르의 반지 따위의 용도는 제쳐두자) 북왕국과 남왕국을 합친 통일 왕국의 왕이자 고귀한 엘프 왕녀의 반려자가 되자면 어지간한 의지력과 집중력,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는 불가능할 일 아니겠는가.

덧) 온도헤르 왕과 함께 전사한 두 왕자의 이름은 각각 아르타미르와 파라미르다. 즉 데네소르는 왕도 못되어보고 요절한 왕자의 이름 따위를 둘째 아들에게 준거다. 첫아들의 이름을 딴 섭정 보로미르 1세 역시 제 명을 못채우고 죽은 인물이긴 했지만 그 쪽은 최소한 섭정직에 올랐고 위대한 전사이기라도 했지 파라미르 쪽은 뭐냐. orz 대체 무슨 의도로 애들 이름을 그따위로 지은 거요, 데네소르 씨! 혹시 당신 아버지 되는 게 불만이었소?
by 하일트 | 2004/12/30 12:05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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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fool at 2005/01/07 11:32
안녕하세요. 우연히 들렀다가 옛 독일어 글들 보면서 살짝 블로그 링크만했는데, 이 글 쿡쿡 웃으며 읽고나서는 못 참겠어서 덧글 답니다. 재밌게 읽었어요. :)
Commented by 하일트 at 2005/01/07 19:47
링크 감사합니다. 옛 독일어 글들에 관심 있으시다니 반갑습니다. 이 블로그 연 제일 큰 목적이 제 전공 관련 이야기들을 하는 거였거든요. :)
Commented by fool at 2005/01/08 08:15
아, 관심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신기해서요. ^^;;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하긴 했지만, 그것 가지고 옛 독일어에 관심있다고 하는 건 아직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외국인이 훈민정음 해례본에 관심 갖는 거랑 비슷한 정도겠죠?
기본적으로 어느 나라건 옛날 말투 좋아하는 건 있긴 해요. Dû bist mîn, ich bin dîn. 같은 경우는 깜찍한 느낌이 좋네요. :)
Commented by Archangel at 2006/12/04 19:30
원작에서도, 당연히 아라곤이 왕이 되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만...;
원작에서도 간달프 할배가 데네소르에게 섭정이 왕의 귀환을 막을 순 없다고 하는 부분 있었던거 같은데 말이죠...
아라곤이 물론 이실두르의 후손이긴 하지만 엘렌딜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아라곤 역시 이실두르의 후손이라는 점보다 엘렌딜의 후손이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하구요. 엘렌딜은 중간계로 건너온 모든 서역인들의 왕이므로 그의 유일한 후손인 아라곤은 당연히 곤도르의 왕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Commented by 하일트 at 2006/12/04 22:09
아라곤이 엘렌딜의 후손이라는 것만으로 곤도르의 왕권을 주장할 수 있다면 아르베두이의 곤도르 왕권 요구 역시 정당했을 겁니다. 하지만 섭정 이하 곤도르의 귀족 회의가 선택한 왕은 에아르닐이었죠. 그리고 아라곤은 에아르닐이 아니라 퇴짜맞은 아르베두이의 후손이고요.
Commented by 카방클 at 2008/01/29 05:59
정말 잘읽었습니다! 시종일관 유머가 철철 넘치면서도 똑 부러지는 글이군요 >ㅅ< 혹시 제가 이글을 스크랩해가도 괜찮겠습니까?
Commented by 카방클 at 2008/01/29 06:02
퍼가는 곳은 '로오리엔의 반지의 제왕 연구소 '입니다
Commented by 하일트 at 2008/01/29 22:55
앗, 무척 오랜만에 보는 반지 관련글의 덧글이군요. 따져보면 제 온라인 지인들 중 상당수가 반지 팬으로 알게 된 분들이지만 저조차도 무척 오랜만에 제 반지 관련 포스팅을 다시 읽게 되니 새삼스럽네요. 스크랩해 가셔도 괜찮습니다. ^^
Commented by 행인 at 2008/04/28 00:44
오오...... 정말 좋은 글이에요! 감탄을 금치 못하다가 마지막에 허리를 꺾으며 웃었습니다......;;; 저어, 이런 부탁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몸담고 있는 네이버의 톨킨 팬카페에 퍼가도 될까요? 물론 출처는 확실히 밝히겠습니다.
Commented by TNDK at 2009/03/18 11:27
너무 공감 가는 말이라 읽고서 퍼갑니다. 출처당근 남기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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