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 코폴라가 감독한 버전을 봤심.
1. 영화 내내 화면 뒤에서 감독의 '전세계 소녀들이여, 단결하라!'라는 부르짖음이 들려왔다. 혹은 'MA 오덕녀들아, 이 언니가 해냈단다!'라는 외침이라든가. 전반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에 대해 사전 지식이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오덕녀들을 위한 영화였음. 첫 아들이 죽는 정황을 초상화 그림이 바뀌는 것으로 암시한다든가 마리 앙투아네트가 발코니에서 한 번 엎어져주니 혁명 군중들이 오오 왕비 오오 모드로 바뀌는 에피소드라든가 이미 다른 경로로 마리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관객은 따라가기 힘들겠더만.
덕택에 영화를 보면서 마리 앙투아네트 오덕질이 결코 베르사이유의 장미로 유년 시절을 살찌운 동북아시아 여인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음을 깨달았음. 단두대에서 스러져간 로코코 왕비님이란 전세계 소녀들의 원형심상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구나. 프티 트리아농이 괜히 친숙하게 느껴지는 데서 나 역시 그 원형심상을 품고 살아가는 일족임을 자각함.
2. 기존에 마리 앙투아네트 영화들이 특히 불어권에서 여러 편 제작이 되었던터라 차별화를 위해서인지 시대착오적인 요소들이 많이 등장했다. 근데 정말 시대착오적으로 묘사된 건 베르사이유가 아닌 쇤브룬이었다. 아무리 베르사이유와 대조를 위해서라지만 역시 절대 왕정 시대의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 궁정이 저리 빈한하게 묘사되다니 지못미 합스부르크. 마리는 부르봉에 전혀 꿀리지 않는 합스부르크 출신의 왕자비가 아니라 19 세기 부르주아 가정에서 타임 워프한 시간여행자처럼 보였다. 나 정말이지 마리의 그 빈한한 혼례마차 행렬을 보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계모인 줄 알았다.(...)
3. 뭐야 황제님 아마데우스의 그 황제님이 더 귀여웠어. 그 황제님을 돌려줘. 페르젠 역의 배우가 나왔을 때는 아니 뭐 저리 재미없고 무개성하게 잘생긴 남자를 캐스팅했지하고 의아해하다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코스프레 중인 페르젠'망상을 보고 이유를 깨달았다. 애당초 페르젠과의 불장난을 딱 저리 얄팍하게 묘사하려는 게 감독의 의도였구만. 남주는 전적으로 루이 16 세였심.
4. 소피아 코폴라의 감정 과잉을 배제한 섬세하고 내면적인 연출 방식은(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늘 베르사이유에는 사람이 많군요' 대사 후 와아앙 울며 뛰쳐나가 종묘사직이 바닥에 떨어졌음을 개탄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녀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의 아이러닉한 미소만으로 지나간다) 과시적인 로코코 궁정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보다는 차라리 마음의 병을 앓던 19 세기 히로인 씨씨를 주인공으로 삼았음 더 잘먹힐 뻔 했음. 보통 사람들이 마리의 극적인 생에서 기대하는 건 드라마틱한 이야기잖아. 이 영화 개봉했을 때 관객들의 반응은 뭥미였지만 감독이 같은 연출 방식으로 씨씨의 생애를 그려냈다면 예술했다고 칭송받았을 것임.
5. 커스틴 던스트, 브라보! 감독 스타일이 요구하는 바에 딱 맞는 훌륭한 연기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