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걸이 사건
가끔 가다가 ‚왜 이걸 이런 식으로 만들었는지’ 순수한 궁금증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창작물들이 있다. 만들어진 방식에서 단 하나의 이점도 그래야할 이유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하게 멍청한 창작물인데 2001 년 작 영화 목걸이 사건도 그 중 하나다.

원래도 망한 영화라 못본 사람들이 많을테지만 제목만 보고도 대충 소재가 짐작이 갈 것이다. 대중 영화로도 만들어질만큼 유명한 목걸이 사건으로 딱 떠오르는 건 마리 앙투아네트를 엿먹인 바로 그 목걸이 사건 뿐이니.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니고 사기꾼 잔느 드 라 모트, 일명 잔느 드 발루아인데 참으로 희한한 것은 이 영화가 잔느를 본래는 선량하고 운명에 희생된 가엾은 여인으로 그리고 있다. 이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잔느는 고귀한 발루아 왕가의 피를 이어받아 발루아 장원에서 곱게 크고 있었는데(풉) 발루아 후손에게 위협감을 느낀 부르봉의 국왕이 가문을 패가망신시킨다.(…앙리 4세는 역성 혁명 일으킨 이성계고 발루아 핏줄은 왕씨냐) 하루 아침에 영락한 몸이 된 잔느는 그래도 발루아 가문의 후예로서의 긍지를 품고 살며 성장한 후에도 참살당한 아버지의 명예의 복권을 위해 애를 쓰지만 실패하고 어떻게든 가문을 일으켜보려는 생각에 목걸이 사건을 벌여 그 돈으로 예전에 빼앗겼던 그 집을 되찾고 어쩌고 하고 나가는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설정인 것이 일단은 역사적 사실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내용이라 ‚대중들에게 왜곡되어 있던 역사적 진실을 보여준다’고 변명할 수도 없고 그 자체로도 몹시 바보같다. 생각해봐라. 사기꾼, 특히 돈 문제가 걸린 사기 사건 범인의 행동 동기는 간단하다. 정당한 방법으로는 벌지 못할 큰 돈을 벌고 싶고 그 돈 갖고 부유하게 살고 싶으니까 사기를 치지. 실제 잔느도 그런 욕망을 품었을테고. 그런데 영화는 이 지극히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동기를 두고 잔느를 가련한 희생자로 만든답시고 그녀의 동기를 더 복잡하게 설명하려 애쓴다. 발루아라는 이름을 영예롭게 만들고 싶었다느니 빼앗겼던 집을 다시 찾고 싶었다느니 하면서. 뻔하고 간단한 동기를 두고 괜히 다른 동기를 만들어 끼우느라 잔느의 행동은 앞뒤가 안맞고 매우 부자연스러워지며 영화의 전체적인 꼬락서니는 매우 바보스러워진다. 보통 원작이나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영화가 굳이 본래 내용이나 사실과는 다른 각색을 할 때는 뭔가 그래서 얻는 이득이 있을 것 아닌가. 예를 들어 난 킹덤 오브 헤븐에서 등장 인물들이 현대식 종교 상대주의를 설파하는 것을 비판했지만 일반적인 현대 관객에게는 실제 중세인들의 사고방식보다는 영화에서 설파하는 현대식 상대주의가 더 이해하기 쉬운 개념인 건 사실이지. 등장 인물들을 그냥 중세옷 입은 현대인으로 묘사하는 게 진짜 중세인을 묘사하는 것보다 더 손쉬운 일이고 그 맥락에서 킹덤 오브 헤븐의 중세인들이 현대인들처럼 사고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근데 이 영화에서 잔느 드 라 모트를 긍정적인 인물로 만들어버린 건 그 어떤 이득도 찾아볼 수 없이 순수하게 멍청한 각색이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잔느가 후손 없이 죽었다는 건 거짓말이고 혹시 감독이 잔느의 후손이어서 발루아의 명예를 복권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나하는 생각을 했다.

힐러리 스웽크가 주연한 영화를 보는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리고 목걸이 사건. 공교롭게도 세 영화에서 모두 힐러리 스웽크는 운명에게 당하는 가련한 희생자를 연기하고 있고. 감독들이 보기에는 이 배우가 되게 불쌍해 보이나?(…)
by 하일트 | 2008/02/20 22:49 | 기타감상들 | 트랙백(1)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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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Avalon의 감자밭 at 2008/02/26 03:15

제목 : 목걸이 사건...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읽지않으신 분들..
하일트님 이글루스에서 목걸이 사건 영화 관련 포스팅을 읽다가, 혹시 초유의 명작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장비라고 오타치고 순간 굳었네요) 못 읽으신 분들을 위해, 그리고 목걸이 사건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 약간 정리해 봅니다. 목걸이 사건은 괴테가 "거짓말보다 더 거짓말같은 진실"(진실보다 더 진실같은 거짓말이라고했던가요? 아무튼.)이라고 칭하기도 했는데요, 사실 진실이 너무 간단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인 사건입니다. 일단 여러분께......more

Commented by 일디스 at 2008/02/20 22:59
제가 전에 펄 벅의 <연인 서태후>를 읽다가 작가가 그녀를 미화했다고 발끈했었는데 이건 훨씬 더 심하군요. 발끈하고 말고를 떠나 아예 이해가 안 되는 상황........
Commented by 해람 at 2008/02/20 23:07
아 저는 이 영화 순전히 애드리안 브로디때문에 어둠의 경로에서 구해본지라 내용이 어땠나는 전혀 신경안썼어요(...)

불쌍해보이는 배우.. 저는 그 언니가 되게 씩씩하다고 생각하는데 어째 맏는 역할은 다 그러네요;;
Commented by 달가림 at 2008/02/20 23:55
....한참동안 마리 앙투와네트를 엿먹인 목걸이 사건이 뭐였지 고민했어요.
엄마야 나 진짜 중학교 올라간 후로 바보가 되고 있나봐<-<
모름지기 사람, 책을 읽어야 하는데 말이죠. 대한민국의 중고등학교에서는 왜 말로만 독서를 장려한다고 하고 제대로 된 지원을 안 해주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이 포스팅으로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도 훑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그리고 이건 사실 말하면 혼나는 내용이겠지만, 소년은 울지 않는다. 저도 본 기억이 있는데요, 당시 레지던트 이블을 부모님과 함께 보고 흥 19세 따위 하는 마음으로 보다가 엄마야 하며 도망갔습니다만, 그 영화 정말 재미있는 영화인가요?;;
Commented by 올썬데 at 2008/02/21 00:11
달가림/ 모름지기 사람은 만화책을 읽어야 합니다. 명작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추천합니다.

힐러리 스웽크는 예전에 10계인가, 하는 귀신들린 영화에서 봤는데 눈매가 서글서글해서 좋았어요. 불쌍해보이는지는 모르겠네요;;; 그러게 그 영화는 왜 그랬대요. 명작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도 잔느에게 뭔가 스토리 부여는 하고 싶은데 (이런 큰 사건을 명작작가가 걍 흘려보낼리 없으니) 잔느에게 부여하자니 너무꼬질꼬질해서 사연가진 그렁그렁한 눈매의 여동생을 만든 것 아니겠어요.
Commented by 푸른솔 at 2008/02/21 08:34
전 힐러리 스웽크를 영화 불면증의 강단 있는 여형사로 처음 본데다 수영복 차림으로 바닷가를 달리는 멋진 화보 때문에 강한 이미지로 보고 있었는데, 감독들 보기엔 다른가봐요? ; 단단한 몸매와 다르게 눈빛이 좀 순한 편이긴 하지만 희생자 역이라니...
Commented by 비안네 at 2008/02/21 14:04
제가 교회사는 비전공자로서는 꽤 밝다고 생각하고, 한국사도 교과서 수준보다는 조금 높게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 외 서양사나 동양사는 영 꽝임을 알게 하네요. 본문에서 언급한 발루아 왕조니 목걸이 때문에 마리 앙투와네트가 엿먹었다느니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질 못하겠어요. (______)

우리나라에서 불멸의 이순신을 방송할 때, 사단장 명령으로 군인들 의무시청이 됐지만...(또 인기도 제법 있었죠) 밀리터리광이나 역사광들한테는 '역사적 사실을 너무 무시하고 극적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꽤나 말들이 많았지요.
Commented by 형식주의 at 2008/02/21 16:53
본인은 이 영화의 의상에 반해서 DVD로 소장하고 있다오.
(주인공이 힐러리 스웽크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음. 힐러리 스웽크가 나온 영화 중에서는 이 <목걸이 사건>을 제일 좋아함. ㅡㅡ)
의상과 소품 면에서는 이후에 나온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마리 앙뜨와네트>가 더 휘황찬란하지만...ㅡㅡ,
이야기 구조상으로는 <목걸이 사건>이 <마리 앙뜨와네트>보다 낫다고 보고 있소. 어쨌거나 <목걸이 사건>엔 <마리 앙뜨와네트>에 없는 결말이란 게 있다구...ㅡㅡ;
<목걸이 사건>도 잘 추려서 보면, 백합물 같은 구석도 있고, 그렇게 나쁘진 않은데... @_@a 함량미달이랄까...'왜 이걸 이런 식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창작물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Commented by 하일트 at 2008/02/21 20:10
일디스/발끈하기보다는 그냥 감독과 술 한 잔 하면서 허심탄회하게 묻고 싶어요. 왜 그리 만들었냐고.

해람/애드리언 브로디는 의외로 비중이 작더군요. 전 처음에 잔느 애인으로 나오는 남자가 애드리언 브로디인 줄 알고 '얼레? 저 남자가 저리 정상적으로 생겼던가?'했습니다.(...)

달가림/하하, 소년은 울지 않는다 좀 하드하죠. 이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 많던데 전 내용 상으로는 그리 큰 재미를 못느끼고(아마 무자막이라 영어 대사들을 못알아듣고 놓친 게 많은 탓이 클 것임;;) 실제 사건 갖고 만들었다길래 다큐멘터리 보는 기분으로 봤어요.

올순대/그 10계도 망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왜 오스카 탄 여배우들은 그 후 영화 고르는 게 다 그 모양이냐고 말도 나오고.(묵념) 사실 잔느는 뻔뻔한 사기꾼 캐릭터라 그 점 잘 살리면 효과적인 악역이 하나 나올 수도 있는데 감독이 괜히 동정표 사보겠다고 엄한 짓 한 거 같아요.

푸른솔/저도 이 여인네 마스크가 꽤 강한 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희생자 역을 할 때 그 괴리감에서 긴장감이 생기기도 하지만 오스카 여우주연상 받은 역 두 개가 모두 불쌍한 역이었던 거 보면 희한해요.

비안네/불멸의 이순신은 제가 못봤습니다만 입소문으로 들은 바에 따르면 경우가 다를 거예요. 불멸의 이순신처럼 대중성을 살리기 위해 고증을 희생한 건 납득이 가는 선택이니까요.

형식주의/소피아 코폴라의 마리 앙투아네트 보고 싶은데 학교 어학 실습실에서 안 들여놔. -.- 목걸이 사건에 이야기 구조가 있는 건 사실인데 대본에 너무 문제가 많아. 보면서 진짜 의상이랑 배우들이 아깝더라.
Commented by 올썬데 at 2008/02/22 04:37
네, 10계 아마 망했을 거예요. 비디오를 고르다 고르다 너무 볼게 없어서 걍 잡은 거였거든요. 별로 재미도 없었어요. 힐러리 스웽크는 예뻤지만.
잔느 영화도 궁금하네요.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는 별로 재미가 없어서 대충 돌려봤어요. 제 느낌엔 베르사유장미 짝퉁같았거든요.
힐러리 스웽크가 오스카도 탔어요? 몰랐네요, 전 얼굴은 이쁜데 저런 영화에 나오는거 보니 B급 배운가보다 불쌍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Commented by 하일트 at 2008/02/23 21:37
힐러리 스웽크 나름 오스카를 두 번 탔어요. 그 사이에 좀 이상한 영화들을 찍고 다녀서 오스카 증후군 땜에 저리 됐다는 소문을 들었죠.(...) 목걸이 사건은 절대로 일부러 찾아서 보지도 말고 혹시 보게 되더라도 기대치를 팍 낮춰요.
Commented by 황금숲토끼 at 2008/02/26 03:18
아마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가 라모트의 비망록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단 두명이었을 겁니다. 세상이 그녀의 진실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좌절해 영화로 세상에 항거한 거지요. 그리고 세상의 단 둘 마이너답지 않게 거액을 들여 영화를 찍는 바람에 폭삭 망한 거고요(응?)

세기의 명저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잘 나와 있긴 하지만,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사실은 마리 앙투아네트 드레스 그림좀 줄줄 올려보고 싶어서) 목걸이 사건 개요를 정리한 포스팅을 한 김에 트랙백 보내드립니다~
Commented by 하일트 at 2008/02/27 19:30
그래도 둘이었다니 전 그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가 부러워요. 제가 나단이 총수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도 만든다고 하면 누가 같이 하자고 해줄지...(눈물)

트랙백하신 글 잘 봤습니다. 아주 정리를 잘해주셨네요. 근데 마리 앙투아네트의 드레스 그림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계셨어요? 특정 세대 한국 여성들은 베르사이유의 로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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