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19 세기 때 고고학 선진국 중 하나였던 덕택인지 베를린에는 1차 대전 후 식민지 몽땅 토해낸 나라 치고는 아시아 및 아프리카 유물들이 좀 모여있다.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식민사업 벌였던 대영제국에 비할 바는 못되어도 박물관 몇 정도는 쉽게 채운다. 네페르티티 흉상이나 이슈타르의 문 같은 진짜 들으면 알만한 유물들도 있고.

하지만 난 학교 앞 서점 안쪽에 덩그러니 놓인 스핑크스가 설마 하트셉수트 여왕을 기념해서 만든 진품인 줄은 몰랐다.(…) 3500 년은 가뿐히 넘은 물건이란 얘기. 3500 년이면 가만있자…한반도에서 청동기 시대던가?

척 봐서는 설마 진품이랴 싶은 것이 3500 년이나 된 유물을 방탄 유리 속에 고이 모셔두기는 커녕 가까이가지 마시오 줄조차 쳐놓지 않고 그저 단 위에 띡 올려놨을 뿐인데다 옆에 경비원도 없었다. 점원들 일하는 카운터는 거기서 십여 미터 이상 떨어져 있고. 박물관이면 들어가기 전에 가방을 맡기기라도 하지 여기는 서점이라서 아무나 들락거리는 판이라 맘 먹으면 옷 속에 망치 하나 숨겨 와서 스핑크스 대가리를 찍거나 스프레이로 스핑크스 몸통에 낙서를 하는 건 일도 아니겠다는 게 방화로 국보 1호가 날아간 나라 출신인 내 소감이었다. 뭐랄까, „우리는 그깟 스핑크스 하나 쯤은 없어져도 괜찮다“라는 대인배의 기상이 좔좔 흐른달까.

한편 유럽 국가 박물관들에 모셔져 있는 제 3 세계 유물들에 대해 ‚남의 문화 유산 훔쳐간 거 아니냐’라는 시각들이 있는데 모든 유물의 경우에 도매금으로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규장각 도서처럼 정말로 들고 튀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유물들도 있지만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땅 속에 파묻히는 바람에 현지인들조차 잊고 있던 것을 유럽이나 미국 출신 고고학자들이 발굴해낸 경우도 있으니까. 투탕카멘 묘도 발굴단이 찾아내지 않았으면 다른 묘들처럼 도굴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잖아. 지금과는 국경선도 다르고 민족 개념도 다르던 시절의 물건을 오늘날의 국경 기준으로 네 것 내 것 따지는 것도 부조리하고.
by 하일트 | 2008/02/19 19:35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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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비안네 at 2008/02/19 19:54
일찍이 조선 무림에 세 고수가 있었으니 한 분은 커발한 이 교주님이요, 다른 한 분은 문 군수님이며, 그 뒤에 선 지존은 흑룡강 최라 하였습니다. 이 세 분이 힘을 모아 술법을 펼치니 후인들 눈이 어두워져, 온 세상 여러 민족 온갖 좋은 것이 실은 한민족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아리안족도 한민족이고 동이래요.
Commented by 윈드라이더 at 2008/02/19 20:40
...웃어야 하는데 눈물이 나와요. 차라리 직지심경이고 뭐고 그냥 외국에서 보존해라, 내가 가서 보마, 싶달까요.
Commented by 니아브 at 2008/02/19 20:53
머 저도 어리던 옛 시절에는 아메리카도 우리 땅인갑다 우와 하긴 했었지만요-ㅂ- 그깟 스핑크스, 대인배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겠죠. '고작 3500년? ㅋㅋㅋㅋㅋㅋ 우린 그런거 유물로 취급 안함 고로 나라에 불만있음 정부 직접 까지 '고작' 3500년 짜리 안 부숩니다 ㄳ ' 이런 느낌일지도요^_^...<-
Commented by 해람 at 2008/02/19 21:50
대인배의 기상...ㄱ-

저도 모든 유물을 니네 훔쳐갔지! 하는데는 이제 그건 아니구나 하고 생각되지만 또 이거 우리가 안 가져갔음 어떻게 되었겠어?라고 하는것도 아닌것 같아요. 역시나 복잡한 문제랄까..

그나저나 이슈타르의 문은 친숙하네요. 요번 학기에 서양미술사 강의를 들었었거든요;;;
Commented by 하일트 at 2008/02/21 19:53
비안네/...커발이 뭡니까?(<- 가끔가다 한국 속어를 못알아듣는 유학생)

윈드라이더/독일은 전쟁 일으켜서 자기네 문화재고 남의 문화재고 다 날려먹을 뻔한 적이 있다고, 그래도 현대 들어서는 전쟁은 안 일으킨 한국이 그 점에서는 낫지 않냐고 쓰려 했는데 생각해보니 한반도에도 한국전쟁이 있었군요.(묵념)

니아브/스핑크스 정도는 뭐가 안되고 정말 네페르티티 흉상 쯤 되어야 방탄 유리 뒤에 위치할 자격이 되나봅니다.

해람/케이스 바이 케이스라서 경우마다 다른 거 같아요. 문화재마다 또 사연들이 제각각이라. 이집트에서 한 때 미이라가 땔감으로 쓰였다는 걸 고려해보면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안 가져갔음 어떻게 되었겠어'라는 말이 나올만도 하거든요.(...) 이슈타르의 문은 정말 메이저인가 보군요. 괜히 제가 다 뿌듯합니다.
Commented by 올썬데 at 2008/02/22 12:35
전쟁 해서 말인데 전 초딩 1,2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우리 나라는 수백번 외적의 침략을 받았으나 우리가 침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자랑스런 민족' 이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어요. (....)
Commented by 비안네 at 2008/02/22 14:17
환단고기를 쓴 사람인 이유립이 커발한 개천각교 교주였습니다. 그걸 비꼬아 한 말이었지요 (___) 환단고기로 상징되는 자칭 '민족史觀'을 저는 몹시 싫어하고 또 경계합니다.
Commented by 하일트 at 2008/02/23 21:44
올순대/우와, 진짜 매저스러운 민족이었군요. 원단수 나단이래도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비안네/결국 커발의 뜻을 검색해봤습니다. 혹시 새로 생긴 디씨 은어인가 싶어 여쭤본건데 민족사학 쪽 용어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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