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zival <69>
68회에서 계속. 1편은 여기로.

잠시 집을 나온 사이에 주인이 다른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중인 것을 본 애완견처럼 가반은 껄렁한 기사의 등장에 경각심을 가졌다. 하지만 나름 침착한 편인 가반은 흥분해서 뛰쳐나가기에 앞서 아르니베 여왕에게 물었다.

„저기 창을 치켜든 기사가 싸움 거리라도 찾는 듯이 오고 있군요. 분명히 그는 찾는 것을 얻게 될 겁니다. 하지만 저 자 옆의 vrouwe는 누구십니까?“

정체도 모르는 여자에게 반해 여지껏 쫄래쫄래 쫓아다녔던 가반, 아마 오르겔루제가 귀찮게 한다고 화낼까봐 그녀 본인에게는 차마 „저, 제가 반한 당신은 어디 사는 누구신가요?“하고 물어볼 엄두를 못내고 참고 있다가 이제야 겨우 기회를 얻었다.

„저 여인은 로그로이스의 공작녀입니다. 그녀를 동반하는 이는 용맹한 투르코이테로 세 왕국을 장식할 만한 영광을 창으로 얻어낸 자이지요. 지금 기사님은 중상을 입으셨으니 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설사 몸이 다 나으셨다 해도 저 자는 피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평생 예의 바르다는 소리 듣고 살아온 가반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아르니베 여왕을 거역해야 했다.

„여왕님은 이제 제가 이 곳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곳에서 제게 도전하는 자는 그가 뜻하는 싸움의 기회를 얻어낼 것입니다. 저는 이제 제 갑옷을 걸쳐야 겠습니다.“

네 여왕들은 눈물을 쏟으며 가반을 뜯어말렸지만 가반 눈에는 네 여자를 몽땅 합친 것보다도 더 오르겔루제가 예뻤기 때문에 고집을 꺾지 않았다. 천천히 그는 되찾은 말 그링굴예테 쪽으로 다가갔다. 아직도 상처 때문에 여기 저기 쑤시는 몸이라 그의 너덜너덜한 방패를 말의 등에 싣는 것만도 힘든 일이었지만 그가 애당초 이 정도 시련으로 끊길 근성의 소유자였다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성 아래로 내려간 가반은 배주인을 다시 만나 투르코이테가 있는 강 건너편까지 건네달라고 부탁했고 배주인은 가반을 뜯어말리지도 않고 대뜸 승락했다. 누가 이기든 진 자의 말은 배주인의 몫이 되는 터라 모든 결투는 배주인에게 있어 환영할만한 이벤트였던 것이다. 가반을 건네주면서 배주인은 투르코이테에 관한 정보를 가반에게 흘려주었는데 투르코이테는 여지껏 모든 싸움 상대를 창 한 방에 쓰러트렸고 그 방식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누구든 자신을 창으로 이기는 자가 있으면 다른 무기로 계속 싸우는 걸 포기하고 항복하겠다고 선언한 인물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맞은편 강가에 다다랐다. 배주인은 가반에게 창과 방패를 넘겨주며 부디 말 위에 꼭 붙어 앉아있으라고 충고했다.

투르코이예 쪽도 무장한 기사가 강을 건너 자기 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 상대의 목적은 짐작한 바였다. 말 한 마디 서로 건넬 것도 없이 두 기사는 상대를 향해 맹렬히 말을 몰며 창을 부딪쳤다. 투르코이예의 창은 가반의 투구끈을 맞추었지만 가반의 것은 적의 투구 눈가리개 부분을 정통으로 때렸다. 잠시 후 투르코이예의 투구는 가반의 창에 대롱대롱 걸렸으나 투구가 벗겨진 기사는 말에서 떨어져 풀밭 위에 뒹굴었다. 그 후 육박전이 진행되었다면 아마도 몸이 완전히 낫지 않은 가반으로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겠지만 투르코이예가 창을 쓰는 것 외의 전투 능력이 퇴화한 뒤라 이 한 방에 투르코이예는 항복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오르겔루제는 가반의 승리에 전혀 감명받지 않았다.

„뭘 그리 싱글벙글이예요? 방패에 사자 앞발 박힌 게 그리 좋아요?저 위 성의 여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싸운 덕에 좀 유명해졌어요? 딱 방패도 너덜너덜해졌겠다 그 여자들한테 가서 잘 살아요. 그 꼴로 무슨 수로 날 섬기겠어요.“

오르겔루제가 부상을 핑계로 자신을 떼놓으려는 걸 눈치챈 가반은 황급히 말했다.

„저, 다 나았습니다, 멀쩡해요. 제 봉사를 받아주신다면 어떤 위험에라도 뛰어들 수 있습니다.“

„뭐 그렇다면 계속 날 따라오는걸 허락하지요.“

주인님이 다시 자길 받아준다고 했겠다, 주인님 옆에 얼쩡거리던 다른 개도 쫓아냈겠다, 입이 귀밑까지 걸린 가반은 열정적으로 꼬리를 흔들어대며 오르겔루제의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기 시작했다. 모험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주인이 되었던 기사가 그렇게 떠나는 걸 본 네 명의 여왕과 사백 명의 귀부인들이 저 위의 성에서 대성통곡을 했지만 가반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가끔씩 자신을 갈구며 독설을 퍼부어대는 오르겔루제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감상하는 데 온정신이 팔려있었으므로.

<다음편에 계속>
by 하일트 | 2006/01/27 05:10 | 주전공잡담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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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바람뫼 at 2006/02/01 11:06
기사담은 주인공들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말이, masochist...
Commented by 하일트 at 2006/02/02 12:19
가반이 좀 유별나긴 합니다...만 어느 장르나 주인공들은 조금씩 그런 끼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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