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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K 에서 모차르트! 다음작으로 올릴 몬테 크리스토 캐스팅 소식을 듣고 묘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주역 때문은 아녜요. 애당초 주역들이야 진작 소문이 돌고 있었고 그 소문이 확정된 것 뿐이니까요. 제가 잠시 '...'한 기분이 된 것은 김승대 씨가 알베르 역이라는 점 때문이었어요. 왜냐면, 제가 저기 카테고리까지 하나 만들어서 빠순질을 하던 예습 삼촌이 바로 몬테 크리스토 백작 영어판 캐스트 앨범에서 알베르셨거든요. 제 현재 취미는 뮤지컬이 아닙니다만 그래도 뮤지컬 쪽에서 본진이자 마음의 고향이라면 예습 삼촌과 쿤사마시고 한국 뮤지컬 쪽 배우들 중 가장 관심가는 분이 서범석 씨와 김승대 씨여서요. 독일어권과 한국, 딱 두 군데서만 무대에 올라가는 작품인데 하필 제 본진과 촉수를 뻗어놓은 관심 배우분이 같은 역에 캐스팅되어 '내 취향에 그 정도의 일관성이 있단 말인가?'하고 약간 놀라고 있어요.(예습 삼촌은 실제 무대에서 그 역을 맡진 않았고 영어판 캐스팅 앨범에만 목소리를 내지만요) 내 처지에 직접 가서 봤을 리는 없고 귀로만 듣고 느낀 감상들.
1. 혹시나 독일어권에도 모차르트! 한국 공연 이야기가 있을까 해서 구글링을 해봤어요. 원제작사에서 뿌린 홍보자료가 돌아다니고 있더군요. 웃겼던 게, 한국에서는 "모차르트!가 워낙 대단한 작품이라서 엔간한 공연장에는 허가를 안내준다능!"하고 홍보를 했잖아요, 원제작사는 지금 "세종문화회관은 아시아에서 제일 큰 공연장 중 하나임! 관객이 삼천 명이나 들어가! 거기서 공연하고 싶어서 작품들 줄 서 있어! 거기에 모차르트!가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벌써 영광이고 명예임"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상부상조라고 하나요. 서로 얼굴에 금칠해주면서 자기도 높이는 거죠. 전 이 뮤지컬 좋아하니까 이렇게 세종문화회관의 위엄을 등에 업고 광고해서라도 독일 땅에서 좀 길게 공연 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삼천 명이나 들어가는 게 자랑거리가 될만한 게 독일어권 극장들은 옛날에 지은 곳들이 많아서 이름난 곳일수록 오히려 규모가 작곤 해요. 베를린에서 주로 뮤지컬이 올라가는 테아터 데스 베스텐스만 해도 건물 자체는 100 년이 넘게 된 문화재지만 무대가 작아서 큰 작품 올라갈 때면 팬들이 배경을 다 살릴 수 있을지 걱정을 하곤 하죠. 모차르트! 함부르크 공연을 했던 극장도 수용 인원이 이천 명이 안 된다고 들었어요. 근데 함부르크 공연 때는 그것도 못 채웠습니다. 지못미. 함부르크 공연 당시 그게 모차르트 음악을 사용한 뮤지컬인 줄 알고 몰려갔던 사람들이 볼프강의 락 스피리츠에 짜게 식어서 나왔다는 설도 카더라로 전해집니다. 모차르트!는 현재 한국에서 작품에 대한 평가는 별로고 캐스팅 빨로 흥행 중입니다만 원제작팀은 아마 "우리 작품은 아시아에서 잘 먹힘"이라는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아요. 원래부터 해외 제작에 관대하고 협조적인 곳이기도 했고요. 오스트리아 뮤지컬이라는 게 국제적으로 마이너다 보니 기본적으로 사주시기만 하면 굽굽, 서비스도 왕창인 듯 합니다. 쿤사마는 엘리 일본 공연을 위해 추가곡도 써주시고 심지어 엘리자베트 소설인지 전기인지 책까지 내셨습니다만 홈페이지에서 "그거 왜 독일어권에서는 못 듣고 못 구함?"이라고 묻는 현지팬에게는 "일본이라서 해준거임. 거기선 그런 게 먹힘. 여기선 안함."하고 계십니다. 한국 관객의 후기에 따르면 쿤사마가 EMK 일하는 거에 되게 만족하신다고 하는데 그건 원제작팀 전반적으로 그런 모양이예요. 원제작사에서 돌리는 홍보문에도 한국땅에서 강한 파트너를 얻게 됐다고 자축하고 있더라고요.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EMK 에서 쿤사마와 레버이 동무에게 이것 저것 재주부리기 시키면 정말로 다 하실듯. 쿤사마 홈페이지에서 디비디 판권 관련 얘기도 있었어요. 왜 뮤지컬 디비디 잘 안 내주냐고 묻는 팬의 질문에 "뮤지컬 공연이 디비디로 나오면 영화 판권 팔아먹기 힘들어짐"이라고 답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막연히 디비디 내면 사람들이 디비디만 보고 실제 공연을 보러 안 올까봐 그러는 줄 알았는데 쿤사마 개인 의견인지 제작진에 널리 퍼진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화 야심을 불태우고 계셨나봐요. 에비타 영화가 부러우셨나. 그럼 엘리자베트 디비디가 나온 건 영화화 야심을 포기해서? 엘리 디비디 꽤 팔린 걸로 아는데 쿤사마든 제작팀이든 영화 욕심은 버리고 그냥 무대 버전 디비디 내주셨음 좋겠어요. 쿤사마가 남이 만든 뮤지컬들 중 마음에 드는 걸로 위키드와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꼽으셔서 뿜었습니다. 이 분 취향은 너무 뻔해요. 위키드는 보나마나 여자 캐릭터들이 중심이 되고 기존에 널리 알려지는 이야기의 새로운 재해석이라는 데 낚이셨을 거고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성장담이라 낚이셨겠죠. 2. 제가 지금껏 버닝했던 소재들 중에는 쿤사마의 뮤지컬보다 훨씬 메이저한 것도 있었어요. 이를테면 영화 반지의 제왕이요. 그런데 이 경우는 제가 원작팬이 아니라 뉴비의 입장이어서 "나의 반지의 제왕은 이러치 아나!" "톰 봄바딜을 빼다니!"하고 파르르 떨 일이 없었죠. 아, 보로미르의 캐릭터 변모에 대해서는 좀 짜증을 냈지만 제가 낚인 건 원작 소설이 아닌 영화였고 그나마도 본격 버닝한 건 두개의 탑 개봉 후라 저는 이미 반지의 제왕이 전세계적 메이저로 뜬 다음 뒤늦게 팬덤에 들어간 한낱 뉴비였어요. 제가 물고 빨던 게 원래 메이저였던 게 아니라 마이너에서 메이저 된 건 모차르트!가 처음이라서(모차르트!가 독일어권에서는 뮤덕들이 다 아는 작품이지만 한국에서는 소수의 팬들 빼면 듣보잡이었잖아요) 전 요 며칠간 전형적인 원작팬의 자세로 "나의 모차르트!는 이러치 아나!"를 외쳐댔습니다. 제 친구 형식주의 말로는 종말론을 외치고 세상의 타락을 저주하는 거리 선교사 같았대나 뭐래나. 본진 가서 길게 투덜거림을 늘어놓은 후 지금은 어느 정도 해탈한 상태예요. 저도 빠순이라 눈에 콩깍지가 씌어있음을 자각했거든요. 원래 빠순이는 사소한 거에도 의미 부여하고 이입하는 게 특징이라서 남들 보기에는 감흥없거나 뭥미싶은 것도 빠순이에게는 다 말이 되고 예술이 돼요. 저한테는 모차르트! 대본의 사소한 지문이나 대사도 장면간의 연결 고리가 되고 작품의 주제 형상에 기여하지만 그게 빠순의 눈으로 보지 않는 여러 사람에게는 읽히지 않는 거라면 그 작품은 딱 거기까지인 거겠죠. 좋아하는 것이 까이면 가슴은 아프지만 그거야 모든 빠순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몫이고요. 사실 나도 왕년에 미스 사이공 스토리 신나게 깠음.(...) 근데 내가 빠질하던 뮤배 오빠는 미스 사이공 빠돌이셨지. 숙명이여. 그나저나 모차르트! 한국 캐스트 분들 노래 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앙상블 분들이요. 제가 왕년에 한국 공연 앙상블에 왕창 실망한 적이 있어서 앙상블 걱정을 되게 했거든요.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셔서 감사해요. 만약 레버이 씨의 음악마저도 병맛 소리를 들었다면 저는 헤어날 수 없는 타격을 입었을 겁니다. O<-< 근데 극은 재미없었다는 사람들도 대체적으로 음악은 좋아라 하고 한국 뮤배분들 가창력이 오리지널 캐스트보다 더 우월한 부분도 있고 해서 다행이라고 좋아하는 중입죠. 공연 보고 온 다른 원작팬들도 노래만큼은 인정하더라고요.
요새 모차르트! 한국 라이센스 공연을 보신 분들 사이에서 스토리나 구성, 캐릭터 같은 대본상의 결점을 지적하는 소리들이 자주 들리더군요. 문제는 이 분들이 무식하고 공연 볼 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게 아니라 진짜 한국 상연 버전이 스토리와 구성, 캐릭터 등등에서 허점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대체 어떻게 올렸길래 쿤사마가 발대본이라고 굴욕당하시는 거냐?!’하고 제가 버럭해서 불법음원(…)을 들어봤는데…음…진짜로 씹는 사람들 말대로 이거슨 지루하고…캐릭터와 스토리가 이상한 공연…;;
1차 문제는 번안입니다. 번안 책임자가 극의 전체 맥락을 놓치고 당장 한 곡 한 곡을 옮기는 데 급급하다보니 캐릭터의 일관성과 깊이가 줄어들었어요. 일례로 콘스탄체의 독창 ‚나는 예술가의 아내라’(원제: Irgendwo wird immer getanzt) 한국 버전에서 콘스탄체는 자신이 무대 공포증 때문에 언니처럼 무대에 설 수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원작에서 그녀가 오페라 가수가 되지 않은 것은 중증의 귀차니즘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귀차니즘과 자기 중심성은 콘스탄체 캐릭터의 핵심이었어요. 프롤로그에서 그녀는 옛적에 죽은 남편 따위는 마음 한구석에 봉인해 버리고 현재 니쎈 부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느라 메스머 박사의 열광에는 심드렁해요. 한국 연출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원작의 콘스탄체는 두번째 등장, 즉 베버 집안 장면에서 늘어지게 카드 놀이 중이예요. 베버 부인도 자기 둘째딸이 게으른 년이라고 투덜거리고요.(다행히 이 가사는 한국어판에도 있더군요) 콘스탄체가 볼프강과 잠시 사랑에 빠져 블링블링하는 것도 순수한 소녀심만은 아녜요. 그녀가 볼프강에게 이끌리는 건 어느 정도는 그 때까지의 자신의 삶이 진절머리 나서 도피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돈 밝히는 속물 어머니에게 게으른 년이라고 들들 볶이며 얹혀 살던 잉여가 콘스탄체인데 어느날 자신이 알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좀 덜 떨어지고 4차원이지만 순수한 볼프강이라는 총각이 나타나요. 콘스탄체는 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내 지겨운 삶을 바꿔줄 거라고 생각하고 사랑에 빠지죠. 이건 현실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입니다. 친정이 지겨워서 결혼으로 도피하는 여자들이 좀 많나요? „친정 엄마는 돈만 밝히고 날 쓸모 없는 잉여 취급하는데, 친정 식구들은 죄다 지긋지긋한 속물인데 저 남자는 날 공주 대접하며 소중히 여겨요. 저 남자와 살면 내 인생이 확 바뀔 것 같아요. 결혼해야겠어요. 결혼했어요. 어? 근데 결혼 전에는 날 지켜준다며 우쭈쭈하던 신랑놈이 바쁘다며 날 팽개쳐요. 헐. 신랑놈 카드로 쇼핑이나 하러 가야겠어요.“ 대충 요게 „노세 노세 내 인생 즐겨~“를 외치는 콘스탄체의 정서인데 여기에 콘스탄체 특유의 귀차니즘과 자기 중심성이 덧붙여지죠. 노세노세 콘스탄체와 블링블링 콘스탄체가 별개의 인물이 아니라 그냥 한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 변하면서 진화하는 것에 불과해요. 사실 콘스탄체가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인 것도 아니고요. 콘스탄체는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의 여자예요. 마이클럽에만 가봐도 콘스탄체들이 득실거려요. 그런데 콘스탄체 자신의 이야기가 사라지고 그녀가 단지 ‚볼프강의 연인이자 아내’로만 어필될 경우 관객들은 혼란에 빠지죠. „저 여자 아까는 볼프강이랑 좋아 죽던 여자 아냐? 왜 저리 바람 들었어?“하고요. 레오폴트 역시 자기 이야기를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볼프강과의 관계에만 집중해서 보면 레오폴트는 지독한 아버지죠. 하지만 레오폴트에게는 그저 그런 예술가로서 세상에서 실패를 겪었다는 쓰린 과거가 있어요. 레오폴트가 볼프강을 자기 품안에 가두려는 건 그가 젊은 시절 예술가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직접 치가 떨리도록 겪어봤기에 아들은 그런 아픔을 겪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안간힘입니다. 원작에서는 레오폴트의 이런 면모가 레오폴트 자신의 대사와 노래 뿐 아니라 남작부인이 부르는 황금별(원제: Gold von den Sternen)에서도 드러납니다. 원작의 황금별에서는 임금님이 왕자에게 이리 말합니다. „저 바깥에서 너는 한 때 내가 그랬듯 실패할 게다. 그러니 내가 이 안전한 곳에서 널 지켜주마.“ 반면 한국판 황금별에서는 왕이 그저 „저 밖은 파멸로 가득찼다. 난 결코 저 밖을 보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한국판 가사에서는 왕이 한때 왕자처럼 룰루랄라 바깥 세상으로 나갔다 실패를 겪고 돌아왔다는 점이 빠져있어요. 황금별에서 왕은 곧 레오폴트를 상징합니다. 한국판에서는 레오폴트가 한때는 볼프강처럼 패기 넘치는 젊은 예술가였으나 실패를 겪고 몹시 방어적인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사연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레오폴트는 ‚원래 그냥’ 엄격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내 운명 피할 수 없어'(원제 'Wie wird man seinen Schatte los')는 총체적 재난입니다. 한국어판 가사만 듣고 그림자가 뭘 뜻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데 존재감만 탓할 문제가 아닌 게 애당초 가사가 수수께끼예요. '다음 중 그림자가 의미하는 바를 고르시오. 1. 콜로레도의 압박 2. 아버지의 압박 3. 아마데 4. 볼프강이 잃고 싶지 않은 자아'라고 문제 냈을 때 3 번 찍을 사람이 예습 안 한 사람들 중에 몇이나 될까요? 대본 번안한 사람도 모르고 연출자도 모르는 걸 무슨 수로 관객이 알겠어요. 번안과 각색은 캐릭터 뿐 아니라 극의 구조까지 바꾸었습니다. 빈 판과 함부르크 판에는 1 막 뿐 아니라 2 막에도 프롤로그가 달려있습니다. 1 막 프롤로그 막판에서는 메스머 박사가 ‚신의 아이’ 아마데를 소환하면서 앙상블이 어린 아마데를 찬탄하는 장면으로 전환됩니다. 반면2 막 프롤로그에서는 메스머 박사가 아마데가 아닌 볼프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메스머 박사는 콘스탄체에게 „대주교에게서 독립한 뒤의 모차르트를 내가 다시 봤는데 사람이 많이 불안정해 보이더라. 그 사람 이상한 구석이 없었느냐?“라고 묻습니다. 1 막 프롤로그에서는 순정 빠돌이로서 신의 아이 아마데를 오오 찬양하기 바쁘던 메스머가 2 막 프롤로그에서는 볼프강의 인간적인 면에 주목해요. 아마데가 아닌 볼프강이 소환되면서 장면이 전환되고 나오는 앙상블 노래가 „여기 빈“입니다. 1 막 도입부에서 신의 아이 아마데를 찬양하던 앙상블은 이번에는 인간 볼프강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뒷담화를 늘어놓습니다. 1 막과 2 막의 도입부는 서로 대응하는 구조입니다. 콘스탄체와 메스머의 프롤로그에서 앙상블의 수다로 전환되는 형식은 동일하나1 막 도입부는 아마데, 2 막 도입부는 볼프강을 다루고 있어요. 그런데 2 막의 프롤로그가 사라지면 극의 형식적인 균형이 깨지고 관객이 극의 구조를 파악하기 힘들어집니다. 모차르트!를 관람한 한국 관객들은 종종 이 극에 기승전결이 없다고 비판하는데 그것은 애당초 1 막과 2 막이 연결된다기보다는 서로 대치하는 구조기 때문입니다. 1막이 기 – 승, 2 막이 전 – 결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1 막은 1 막의 이야기를 풀고 2 막은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1막은 볼프강이 자유를 찾아 다른 인간들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방담입니다. 볼프강은 아버지의 과보호와 대주교의 권력에서 무사히 탈출합니다. 1 막에서 아마데는 어느 정도는 볼프강의 동반자예요. ‚예술가가 속세의 권력자들보다 위대하다, 대주교보다 내가 낫다’는 볼프강의 신념은 그저 음악이라는 신이 내린 사명만을 섬기는 아마데의 태도와 비슷한 감이 있죠. 하지만 대주교의 압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직후 볼프강은 사실은 아마데야말로 자신을 속박하는 그림자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볼프강의 해방담은 막을 내리고 극은 전환을 맞습니다. 2 막에서 볼프강은 인간 관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람들과 관계맺기를 소망해요. 그는 콘스탄체와 사랑을 나누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누이를 도우려 하고 아버지와 화해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아마데에 의해 막힙니다. 2 막은 볼프강의 해방담이 아니라 본격 아마데가 볼프강 말려죽이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절정은 ‚모차르트, 모차르트!’와 그 뒤에 이어지는 볼프강의 죽음 장면입니다. 앙상블의 멋드러진 화음이 빛을 발하는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황금별과 함께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넘버입니다. 하지만 실은 극 중에서 가장 끔찍하고 무서운 넘버기도 해요. 극중에서 앙상블은 세 번 모차르트라는 인간에 대해서 수다를 떱니다. 제일 처음은 1 막 프롤로그 다음 신의 아이 아마데가 귀엽고 신통해서 호들갑을 떨 때입니다. 두번째는 2 막 프롤로그 다음 인간 볼프강에 대해 정신없이 뒷방아를 찧어대는 ‚여기 빈’이죠. 세번째는 ‚모차르트, 모차르트!’로 이 곡에서는 다시 인간 볼프강은 실종되고 아마데만이 찬양받습니다. ‚모차르트, 모차르트!’에서 앙상블은 모차르트가 신이 내려준 기적이라느니 그의 음악이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어준다느니 신성과 이어준다느니 찬양을 해댑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아마데가 갖춘 면모예요. 인간 볼프강은 완전히 잊혀졌어요. 왜냐면 ‚모차르트, 모차르트!’가 나오기 전에 볼프강의 인간 관계는 이미 단절되어 버렸거든요. 부모님과 누이, 콘스탄체는 그를 떠나버렸습니다. 콜로레도는 그에게 패배했고요. 다 아마데 때문이죠. 인간 볼프강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볼프강은 세상에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이 알아보고 기억하는 건 오로지 아마데와 아마데의 음악 뿐입니다.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볼프강이 아마데에게 완전히 먹혀버렸다는 것, 세상이 모차르트를 천재 아마데로 박제해버렸다는 것을 상징하는 넘버입니다. 그리고 그 넘버가 끝나면 껍데기만 남은 소외된 볼프강은 아마데에게 살해당합니다. 아마데를 찬양하는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울림이 크고 아름다울수록, 웅장하고 천상의 소리에 가까울수록 뒤에 이어지는 볼프강의 죽음은 쓸쓸하고 비참해집니다. 그게 이 극의 절정이예요. 모차르트!의 클라이막스는 웅장하기만 하거나 비참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웅장함과 비참함 둘 다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극 중 아마데의 역할이 불분명하고 ‚모차르트, 모차르트!’와 볼프강의 죽음 사이의 연관성이 관객에게 전달안될 경우에는? 관객들이 이리 외치게 되죠. „시발, 이거 장면이 왜 이리 뚝뚝 끊겨? 왜 이리 왔다갔다 해? 그냥 저리 픽 죽은 거야? 이게 끝이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뮤지컬 모차르트! 원작은 결코 산만한 작품이 아니란 얘기예요. 오히려 이 작품은 매 장면이 매우 정교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캐릭터들 또한 복합적으로 얽혀있고요. 적어도 대본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곳의 맥락이 끊기면 전체가 우수수 흩어지고 맙니다. 유일하게 붕 떠 있는 캐릭터는 쉬카네더입니다. 모든 캐릭터들이 마치 서로 짜고 작당이나 한 듯 볼프강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느라 여념이 없는 가운데 쉬카네더는 퍽 무해한 친구로 나오죠. 이건 쉬카네더의 솔로곡이 고전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패러디이기 때문일 겁니다. 모차르트!의 다른 노래들은 철저히 스토리 전개와 캐릭터 표현에 종속되어 있지만 쉬카네더의 솔로곡은 잠시 관객들이 아무 생각 없이 어깨를 들썩일 수 있는 화려하고 떠들썩한 여흥을 제공합니다. 쉬카네더 역의 배우가 솔로곡을 부르면서 해야 하는 것은 연기가 아니라 퍼포먼스입니다. 그는 무대를 한 번 뒤흔들면서 관객들의 혼백을 잠시 40 – 50 년대의 브로드웨이로 데려가야 합니다. 비슷한 기능을 하는 곡으로는 볼프강의 ‚똥 묻은 돼지꼬리’가 있죠. 쉬카네더의 솔로곡은 „있으면 흥겹고 재밌지만 없어도 극 전개에 별 상관은 없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초연 후 쉬카네더의 비중은 확 줄었어요. 안그래도 뮤지컬치고는 꽤 긴 상연 시간을 가진 작품인데 쉬카네더 역의 배우에게 장기자랑까지 시키기는 벅찼던 게죠. 그래서 함부르크나 헝가리 판에서는 쉬카네더의 존재감이 확 줄어듭니다만 한국판에서 갑자기 부활한 것은…아마도 제작팀이 쉬카네더 역의 배우분들을 좀 더 써먹고 싶어서였겠죠. 쿤체 씨의 홈페이지 명은 storyarchitekt, 즉 스토리 건축가입니다. 이분은 자신이 아예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창조해내는 작가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올려 구성하는 건축가라고 주장하세요. 그러던 분이 한국땅에서 „극 구조 시망“같은 소리를 들으며 굴욕당하시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참 신선합니다. 사실 모차르트! 대본이 완벽한 건 아니고 빠순이인 제 눈으로 봐도 전개가 불친절하거나 너무 급박하게 시간이 흐르는 감이 있긴 한데요 그래도 시망 소리 들을 수준은 아니거든요. 문제는 앞에도 썼듯 그 시망이라는 평이 한국 상연 버전과 관련해서는 일리가 있다는 거죠. 빠수니가 쉴드를 치고 시픈데 쉴드를 칠수가 엄써. 난 햄보칼 수가 엄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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