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애니를 본지 하도 오래돼서 실사 영화 보기 전에 애니 복습을 했는데 너무 오래 전에 나온 작품이라 그사이 느낌이 많이 달라지긴 했음. 애니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가만히 앉아 남들이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여성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랑과 운명을 찾아 행동하는 새로운 여성상 소리를 들었음. 90 년대 전반에는 여자가 먼저 남자 좋아해서 자기 힘으로 사랑 얻겠다고 길 떠나기만 해도 진보적인 거였음.
근데 2020 년대에 같은 애니를 다시 보니 이거 러브 마이셀프 못하고 자신의 타고난 신체 조건과 고유 환경을 비관하는 정병 남미새 얘기가 되어버리데. 안데르센의 원작 소설에서는 인어 공주가 불멸의 영혼을 원하기 때문에 영혼을 가진 인간들을 동경한다고 설명이 되지만 애니에서는 영혼 어쩌고 하는 설정은 빠져버림. 그러니 디즈니판 인어 공주는 그냥 자기 지느러미도 싫고 바닷속도 지겹고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자기혐오 정병이 되어버림. 마치 인간이 자기는 팔뚝이 싫고 팔 대신 날개 있었음 좋겠고 새들처럼 살고 싶다고 망상하는 거랑 비슷함.
그래서 이 설정을 건드리지 않으면 2020 년대에 적합한 리메이크가 되진 못하겠다고 우려하면서 영화관에 갔는데...우려하던 부분은 그대로 남아있고 대체로 원작 애니보다 더 나쁜 점들이 늘어난 영화가 됐음. 기본적으로 원작을 쓸데없이 늘려놔서 지루함. 막판에는 이거 언제 끝나나 하면서 봄.
좋았던 점들을 그래도 꼽아보자면 막판의 우르술라 거대 변신 장면은 인상적이었고 왕자 솔로곡 생긴 것도 좋았음. 왕자도 자길 구해준 미지의 여인과 사랑에 빠졌음을 소설 및 애니에서보다 더 강조함으로써 에리얼과 왕자의 쌍방 짝사랑이 된 게 로맨틱하게 느껴졌음. 에리얼이 왕자를 원하는 것만큼 에릭도 에리얼을 갈망하는 게 느껴져서.
나빴던 점은 우선 전체적으로 연출 퀄이 떨어짐. 환타지 장르임에도 시각적 상상력이 부족한 건 치명적. 대체로 디즈니 실사 영화들이 다 원작 애니만 못하다는 평이지만 그래도 알라딘이 프린스 알리 장면만큼은 원작을 능가하는 초월이었던 반면 인어 공주에는 그만큼 잘 뽑힌 장면이 하나도 없음. 언더더씨도 키스더걸도 와 이건 신박하다 싶은 연출이 하나도 없었고 그저 어둡기만 함. 언더더씨는 바닷속이라서 어둡고 키스더걸은 밤이라서 어두움.
에리얼의 엄마라든가 우르술라의 과거, 에리얼 아빠가 인간을 혐오하는 이유 등에 대해 설정들이 새로 생겼으나 언급만 될 뿐 그 설정들로 인해 새로 생겨난 스토리가 없음. 그냥 떡밥만 흘리고 땡. 난 에리얼 아빠가 인간들이 바다 오염시키는 거에 대해 분개하길래 아, 현시대에 걸맞게 환경오염 관련해서 인간과 인어의 갈등으로 얘기가 풀리려나 했는데 그냥 그리 말만 하고 땡이었음.
영화 퀄을 떨어트리는 데 일조한 건 주인공 역 할리 베일리의 딸리는 연기력. 이런 메이저 영화에 쌩신인을 주인공으로 꽂으니까 당연히 영화가 더 루즈해지지. 더군다나 인어 공주가 중간에 목소리를 잃고 표정 연기로 작품을 이끌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주인공의 연기력 부족은 더 치명적임. 인어 공주가 물 밖으로 나와 좌충우돌하는 장면들은 할리 베일리가 코믹 연기 감각이 있었으면 살릴 수 있었을 거고 왕자와의 연애도 로맨스 연기 감각이 있었으면 더 흡인력이 있었겠지만 신인 배우한테 바랄 걸 바라야지. 할리 베일리는 백인 배우였음 그냥 처맞을 발연기를 해놓고서도 피부색 덕에 피씨충들의 비호를 받는 중인데 대신 피부색 때문에 인어 공주가 왜 흑인이냐고 안 먹어도 될 욕도 먹었으니 쌤쌤인 걸로 해두자. 그래도 할리 베일리는 노래라도 자기가 했다는 점에서 미녀와 야수의 엠마 왓슨보다는 나았다. 걘 신인도 아니고 노래를 자기가 하는 것도 아닌데 로맨스 연기가 안 돼서 벨이 야수 사랑하는 게 그냥 인류애로 보였지....덧붙이자면 우르술라 역 배우는 시각적 연기는 괜찮은데 노래가 원작 애니보다 딸려서 poor unfortunate soul 장면의 청각적 임팩트가 떨어짐.
인어 공주가 흑인인 건 어차피 허구의 종족이라 전혀 문제가 안 됨. 흑인이라서 문제인 건 인간 캐릭터들임. 이 영화는 근대 카리브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지역의 실제 역사는 싸그리 밀어버리고 모든 인종이 신분 차별 없이 섞여 사는 가상의 나라를 만들어놓고 „우리가 이렇게 pc 합니다^^“ 하고 좆같이 피씨팔이 중임. 조선시대 배경으로 실제 조선 여성사는 치워버리고 여자들이 왕도 하고 신하도 하고 과거 시험도 보는 가상의 세계 만들어놓으면 그게 정치적 공정성이냐?
아메리카 대륙은 백인들의 이주와 식민화, 노예 노동, 혼혈 등을 거치며 본래 거주민들과 이주 백인들, 이주 흑인들이 얽히고 섥혀 복잡한 역사를 쌓아올린 곳임. 북미도 남미도 마찬가지임. 그런데 이 영화는 그 복잡한 투쟁과 배척과 융합의 사연들을 다 밀어버리고는 ‚인종과 관련해서 아무런 문제도 존재한 적이 없는‘ 가상의 세계를 세워버림. 정작 미국 배경으로는 이런 짓 못할 거면서 미국인들이 상대적으로 무지한 카리브해 지역을 배경으로. 거기도 사람 있고 역사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조선 배경으로 ‚성별과 관련해 아무런 문제가 존재한 적 없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버리면 그게 귀찮은 건 그냥 치워버린 영화지 성별 문제에 대한 진짜 성찰이 있는 영화냐? 성찰 하기 싫으면 그냥 아예 하지 말든가. 모든 영화가 인종이나 성별, 빈부 갈등, 장애인 차별같은 문제를 다룰 필요는 없음. 이런 거 안 다루고도 얼마든지 좋은 영화 만들 수 있음. 피씨 없이도 영화 잘 만들 수 있다고. 근데 피씨팔이는 해야겠고 생각은 하기 싫고....
근데 또 남주까지 흑인으로 캐스팅했다가는 진짜 흑인들만 보는 영화 될까봐 걱정이 됐나봐? 왕자 배우는 백인남으로 캐스팅했는데 또 인간 상류층에도 흑인 넣어줘야 해서 왕자 애미는 흑인 여배우. 인어들이야 가상의 존재니 백인 애비 밑에서 온갖 인종의 딸들이 태어난다 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인간 캐릭터로는 그럴 수가 없으니 왕비가 왕자를 입양했다는 어거지 설정을 만듦. 아하, 카리브 해안의 어떤 왕국에서는 왕과 왕비가 아무 애나 주워서 후계자로 입양을 했다고요. ^^ 뭐 쿠바라고 치면 어차피 미국의 적인 가난뱅이 빨갱이 나라니까 역사와 문화를 어찌 왜곡하든.
이 영화가 인종을 다루는 방식 중 유일하게 마음에 든 장면은 인어 공주가 인간들에게 발견된 후 백인 여자들이 인어 공주의 발에 신발을 신겨주고 옷을 입혀주는 거임. 역사적으로는 흑인 노예들이 백인 여성들에게 그리 시중을 들었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비롯해 무수한 영상물들에서 그런 장면들이 재현됐음. 인어 공주는 그 역사를 백인 여자들에게 흑인 여자의 시중을 맡김으로써 비틀어버리는데 이거 하나 좋았음. 이건 현실에 존재한 차별을 붙잡아 비틀어버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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